데몰리션(2015)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아내가 말을 건다. 평상적인 말들, 물이 새는 냉장고를 왜 고치지 않았냐는 그녀의 말에 남자는 별 반응이 없다. 아무래도 중요한 일이 아니라서, 대충 넘겨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집에 가서 손을 보겠다고 대답한다. 담담하게 말하던 자신을 뾰로통한 표정으로 보던 아내가 그 순간, 죽는다.
교통사고로 운전을 하던 아내는 뇌를 다치며 목숨을 잃었고, 자신은 셔츠에 피를 몇 방울 묻힌 채 살아난다. 같은 차에 탔는데 이런 상황이 일어난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다. 아내의 장례식을 마치고, 데이비스(제이크 질렐할)는 제시간에 출근하고, 일한다. 장인이 운영하는 투자 회사에서 펀드매니저로 일하는 그는 일중독자다. 그런 그를 보면서 사람들은 이상한 눈초리를 보낸다.
어떻게 부인이 죽었는데, 저렇게 담담할 수 있는지.
데이비스는 아무렇지 않다. 자신이 생각해도 상하다. 눈물도 안나고 무덤덤하다. 다만 신경쓰이는 게 있다. 아내가 영안실에 들어갔을 때, 자판기에서 초콜릿을 빼려고 돈을 넣었는데, 초콜릿이 나오지 않았다. 데이비스는 그 자판기를 관리하는 회사로 편지를 보낸다. 할 말이 산더미처럼 많다.
자신이 초콜릿을 먹으려고 했는데, 나오지 않았을 때의 기분. 왜 병원에 가게 되었는지. 아내와 어떻게 결혼하게 되었고, 지금 기분이 어떤지. 자신의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데이비스는 계속해서 편지를 쓴다.
퇴근 후, 멍한 표정으로 리모콘으로 채널을 돌리다가, 부엌으로 향하는데 전화 한 통이 온다. 낯선 번호이고, 새벽 2시다.
"편지 보고 울었어요. 혹시 대화할 사람은 있나요?"
전화를 건 사람은 자판기 회사의 고객센터 담당자인 캐런(나오미 왓츠)이다. 익명의 대상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데비이스는 한결 마음이 편안하고, 답답함이 해소된다. 그렇게 그녀와 통화를 이어나가고, 이따금 편지를 보낸다. 그는 평소처럼 회사에서 근무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이상해진다. 그의 표정은 늘 허공을 걷는 사람처럼 무감각하고, 넋이 나간 것처럼 보인다. 어느날, 장인 필(크리스 쿠퍼)은 데비이스에게 말한다.
"뭔가를 고치려면 전부 분해한 다음 중요한 게 뭔지 알아내야 해."
그는 주변의 사물들을 해체하기 시작한다. 보이는 것중에서 원하는 것은 뭐든지 분해한다. 회사의 화장실, 집안의 오디오, 냉장고 등. 그렇게 사물을 해체해도 그의 속은 전혀 시원해지지 않는다. 어느 날, 캐런을 우연히 마주친 데이비스는 그녀의 집을 알게 되고, 그곳을 무작정 찾아간다. 그녀에 대한 이성적 감정은 아니다. 그저 가고 싶었던 마음에서였다. 캐런은 그런 데이비스의 내면을 알아준다. 그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그의 집에 놀러올 수 있도록 허락한다.
자신의 부, 명예, 재력과 비교되지 않는 하층민의 삶을 사는 캐런과 있으면서 데이비스는 편안함을 느낀다. 싱글맘으로 사는 캐런은 방황하는 청소년 아들 크리스와 둘이 살고 있다. 호기심 많고, 엄마가 사이가 좋지 않고,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의심하는 전형적인 사춘기 소년이다. 데이비스는 크리스와 가까워지며, 그의 고민을 해결하는 상담사 역할을 한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거야."
자신이 게이인지, 바이인지를 의심하는 크리스를 향해, 데이비스는 스스로 마음의 소리를 들을 것을 권한다. 그렇게 자신과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데이비스는 한결 가벼워진다.
캐런과 크리스와 가까워진 이후에 데이비스는 더욱 변한다. 데이비스가 큰 이어폰을 귀에 꽂고, 출근길과 회사 건물 앞에서 갈매기춤을 추면서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있다. 회사의 오너이자, 장인 필도 데이비스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해. 줄리아(내 딸)이 아니라, 네가 다쳐서 죽었어야 했어!"
회사의 오너이자, 부유한 장인에게 늘 부족한 사위였던 데이비스도 분노가 폭발한다. 그는 장인이 설립한 줄리아 명의의 후원재단 행사에 참여하여 폭탄같은 말은 던진다.
"대체 줄리아는 일년 전에 임신을 한 적이 있는데, 왜 저한테는 알리지 않았을까요?"
그가 아내의 죽음 앞에서 슬픈 눈물이 나오지 않던 이유는 부인에 대한 사랑이 적어서가 아니다. 어쩌면 내면에 깔려있는 아내에 대한 분노가 슬픔을 막아선 것이다.
그의 질문에 장모님은 대답한다. 줄리아의 뱃 속에 있던 아이가 데이비스의 아이가 아니라고. 데이비스는 뭔가 한결 편해진 기분이다. 그제서야 줄리아의 무덤 앞에 꽃을 들고 갈 수 있고, 끊임없이 사물을 분해하는 일도 멈춘다. 이상하게 머릿 속에 파편처럼 떠오르던 아내에 대한 기억들도, 연속적으로 스친다. 그제서야 아내를 진심으로 추모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인간은 나름의 고통을 해소하는 방식이 있다.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한 아내를 인정하는 것은 데이비스에게 너무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스스로 줄리아에 대한 사랑이 매우 컸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었을 것이고, 그 와중에 줄리아의 배신(다른 남자와의 외도)를 짐작하면서 그는 더욱 괴로웠던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없는 거대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조금씩 그것들에 다가가면서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데이비스가 눈물이 나지 않은 이유는 진정으로 줄리아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눈물로 표현되지 않을 정도로 그의 상처는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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